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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ibmc

허철선(Charles Betts Huntley) 선교사님과 40년!

홍장희목사 (IBMC 원장)


하나님의 일은 항상 우리에게 신비가 된다. 나의 전화에 이런 메시지가 날아왔다.

“선교사님 출생일이 1936년 7월 9일, 한국 선교를 마치고 귀국하신 날도 1985년 7월 9일(추정), 추모예배일도 2017년 7월 9일, 목사님 신비하네요.”

나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그 분이 계획하신 일이예요.”

나는 2017년 6월 12일 미국 NC, Cary에 계시는 허철선(Charles Betts Huntley) 선교사님 부부를 방문했다. (선교사님 이름을 평소에 즐겨 사용했던 헌트리선교사로 줄여 사용한다) 나의 방문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

나는 2012년 노년에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을 찾았다. 은퇴를 준비하여야 할 나이에 대학원 입학을 했다. 나의 의도보다는 무엇에 매임을 받아 이끌려 온 것이다. 나를 따라온 아내도 나까지 왜 미국에 따라와야 하느냐고 불편을 호소했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같은 나이 뻘의 목사님을 만났다. 그 분은 은퇴하셨는데, 사위와 딸이 풀러신학교에 공부하러 와서 손자들을 돌보아 주려고 여행 삼아 오셨다는 것이다. 나도 당장 그만 두고 돌아가 이정도 해서 사역을 마치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어났다. 나의 마음이 흔들렸다.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간, 시간마다 반전이 일어났다. 특별한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격려와 함께 지나온 날들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젊은 시절 미국남장로교 선교사와 함께 사역했던 기억도 함께 따라왔다. 이러한 기억들은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정리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시간과 연결되었다. 역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서 섭리하고 계심을 보이셨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던 일들이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시간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개발된 은사는 ‘교회개척’ 으로 정리되었고 평생사역으로 ‘교회개척연구원’의 비전도 품게 하셨다.

두 번째 이야기

이 일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몸이 지치도록 책과 씨름하며 여러 해를 보냈다. 나름 연구를 계속하다가 어느 날 더 이상 진전을 하지못하고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다음을 찾지 못한 것이다. 연구를 중단하고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 지난날 함께했던 헌틀리선교사님을 찾는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헌틀리선교사님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아직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무척 다행이라 여겼다. 지체할 수 없어 지도교수와 함께 연구실에서 비행기 티켓을 먼저 마련하고 메일과 전화로 일정을 알렸다.


2016년 5월 19일 지도교수와 함께 처음 방문이 이루어졌다. 글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의 시간들이었다. 허철선 선교사님은 이틀 동안 눈시울을 붉혔고 사모님은 남편의 뛰는 심장을 염려하여 늘 손을 잡고 안정을 시켰다. 우리 모두는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에 돌아와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철없이 투정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미국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조를 때마다, “당신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농, 어촌 (호남지역)을 위한 사람”이라고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철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우리가 만난 첫 마디는 한국말로 똑똑하게 “이놈, 아직 살아서 왔구나!” 였다.

“이놈, 아직 살아서 왔구나!”

이 말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발화되던 때에 너무 끔직한 상황을 겪으면서 내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자 죽은 것으로 여기고 울면서 나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 앞에 달려갔을 때 나를 가슴에 안고 울면서 하는 말이 “이놈, 아직 살아있었구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5.18 이야기로 시작해서 5.18이야기로 마쳤다. 중요 현장에 있었던 나는 5.18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일부러 외면하고 찢겨진 마음을 감추고 살아왔는데 잊혀진 그 모든 것도 되살아났다.


함께 동행했던 지도교수는 그 때에도 프로 정신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연구한 사역을 설명하고 선교사님의 유품을 요구했다. 헌틀리선교사님은 1982년 10월26일 나의 결혼식 주례를 하셨는데 그때 사용한 주례 노트를 건네며 자기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는 말도 놓치지 않았다.


지도교수는 다음으로 나를 무릎을 끓게 하고 헌트리선교사 부부의 안수 기도를 요청했다. 헌트리선교사 부부는 머리에 손을 올려 나를 위하여 안수기도를 하셨다. 기도 내용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음 사역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을 담아 기도하신 모습이 사진에 담겨있었다. 지도교수는 기도도 하지않고 소중한 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부탁하였다. 모두가 다 오래 전 사람들이었고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계셨다. 이름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별히 부탁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양림동 옛 헌트리선교사 집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꼭 찾아가 감사한 마음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부탁한 대로 광주 양림동 옛 헌틀리선교사 사택을 찾았다. 이전에 헌트리선교사 가족이 휴가를 떠나면 잔디를 깎고 집을 지켰던 집이라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발걸음이었다. 아래층 창고를 바라볼 때 오래전 오토바이를 타고 호남지역을 순회하던 그 오토바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건물이 오래되어 무너져 내려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는데 다행스럽게 곳곳에서 건물을 보존하려는 흔적이 엿보였다. 그 건물은 ‘The 1904’ 선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영성이, 예수의 생명이 흘러 계속되기를 바라며 24시간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에게 헌트리선교사의 소식을 전하고 부탁한 일을 마쳤다.

이 소식은 두번째 일을 만들었다. 헌트리선교사 소식을 접한 ‘The 1904’ 는 이 소식을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어머니들의 모임인 ‘오월어머니집’에 알렸다. 이 소식을 접한 ‘오월어머니집’ 에서는 2017년 개원 11주년 기념 오월어머니상을 헌트리선교사 부부에게 드리기로 결정했다.

오월 어머니집 가족들은 5.18 당시에 헌트리선교사님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울 때 함께한 그 분을 잊지 못하고 처음부터 상을 마련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방법을 찾지 못하고 미루어 왔던 것이다. 지난해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헌트리선교사님을 한국에 모시기로 하고 정성껏 맞을 준비도 했었다. 그러나 큰 기대와는 달리 건강상 이유로 오시기 어렵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기대하고 준비한 사람들의 실망은 지켜보지 않았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2016년 5월 19일 헌트리선교사님을 방문했고 마지막 나서는 길에 꼭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은 이런 이유에서 간곡히 부탁한 사실을 돌아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사정을 알고 다음해 6월 중에 미국에 갈 계획이 있음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오월 어머니집’에서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11주년 기념일에 헌트리선교사를 위한 상을 준비한 것이다. 2017년 5월16일 기념식에서 헌트리선교사에게 드리는 상을 내가 대신 받았다. 나는 감사의 마음이 담긴 상패와 부상으로 받은 100만원을 달러로 환전하여 $900준비하고 또 하나의 방문계획을 준비한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나는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평생사역으로 비전을 품었던 ‘교회개척연구원’을 언제 개원하고 시작하느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기회를 찾았다. 설립 배경에 담긴 내용대로 여리고 성벽을 넘어야할 각오도 있어야 하지만 사역에 비해 가소롭고 부끄러운 내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틀리선교사님을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작년 헤어질 때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겠습니다” 이 말씀이 나의 머리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헌트리선교사님들과 함께 한 시대를 감당했던 원로 은퇴목사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통화하지 못한 원로 목사님에게 ‘교회개척연구원’ 개원예배순서 기도를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의 기도가 절실하게 여겨졌다. 한 분 한 분 찾을 때마다 모두 마음을 같이해 주셨다. 전남노회 은퇴목사회 후원으로 2017년 5월 19일 ‘교회개척연구원’ 개원예배를 옛 헌틀리선교사 사택 가든에서 가졌다. 한 시대를 감당하셨던 원로 어른들의 사역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할 책임을 크게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또 한편 이 소식을 헌틀리 목사님에게 전하고 싶었다. 헌틀리선교사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사역의 열매를 보여드리고 싶어 부족하지만 서둘렀던 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

2017년 6월 중순에 미국에 가야하는 이유는 지난해 헌트리선교사님을 만난 이후 그 동안 연구했던 논문을 마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도 헌트리선교사님을 만난 후 연구결과를 인정했다. 눈 앞에 펼쳐진 일들을 공유하면서 행복해 하셨다. 그리고 특별상(Award of Donald McGavran) 까지 마련해 주셨다. 준비된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하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17년 6월 8일-10일까지 풀러신학교 학위수여식이 있었다. 나는 선교대학원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호남지역 교회개척 선교전략 연구”로 선교목회학 박사를 수여받았다.

“A missiological description of the Honam church planting strategies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Church growth perspectives of Donald McGavra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School of Intercultural Studies. D. Min. in Global Ministry.


나는 2006년 5월 12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Howard University School of Divinity 와 호남신학대학교 박사원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목회학 박사과정을 마지막 그룹으로 참여하여 학위를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과정을 간과하고 중도에 마치려고 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은 계속 연구할 것을 종용했고 한국에까지 찾아와 독려하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 사역해온 모든 과정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의미는 하늘보다 더 큰 은혜로 채워졌다. 나만이 알 수 있는 또 다른 비밀이었다. 지도교수님은 이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게 대처하셨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마쳤지만 아무도 진심 어린 축하는 없었다. 그렇다고 더욱 자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서 나는 내 삶에 계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기쁜 마음으로 헌트리선교사님을 찾아 달려갔던 것이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둘째 아들에게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아들은 미국에 있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미국에 동행했지만 풀러신학교 졸업과 헌트리선교사님 까지 만나야 하는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아들은 불평대신 “이번에 비행기 실컷 탄다”고 불만을 대신했다.


2017년 6월 12일 아침 롤리-더럼 국제공항(RDU)에 도착했다. 작년에 방문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꼈다. 헌트리선교사님 방문을 위하여 37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도 참석했다. 새로운 정부 이야기와 대통령의 진심어린 연설도 꼼꼼히 챙겼다. 마지막 노년을 위로하고 많은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아들과 함께 문 앞에 이르자 예상한 대로 기뻐하며 맞아주셨다. 아들과의 동행을 더욱 기뻐하셨다.

나는 장사꾼처럼 자리를 펴고 선물들을 하나 하나 꺼내 들었다. 개인이 부탁한 와이셔츠, 오월어머니집 상패와 $900, 교회개척연구원 개원예배 순서지와 사진들을 펼쳐 보이며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하려고 전력했다.



헌트리선교사 부부도 우리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 박사학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 했고 비로소 젊은 날에 공부하고 싶다고 철없이 투정했던 다툼도 기쁨으로 해결되었다. 예쁜 카드에 한글과 영어로 기록한 축하의 글과 $100달러 귀한 선물이 담겨 있었다. 변화산의 경험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었다. 의와 평강과 기쁨을 크게 경험했다.

글을 시작하면서 신비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하였다. 1978년에 헌트리선교사님 부부 만남을 시작으로 2017년 늦은 나이에 학위를 마치기까지 정확하게 40년이다. 지난 40년의 시간을 헤아려 확인한 후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의 무리속으로 들어간다. 메마른 사막을 지나며 불과 구름기둥을 경험하고 다 설명하기에 지면이 좁다. 노아시대의 40일 주야 비를 내리는 심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지체하면서 받은 십계명,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한 40일, 다윗이 블레셋 군대와 대치한 40일,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가 새 힘을 얻어 호렙산을 향하던 40일,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은 40일 회개기도, 예수님 공생에 시작과 함께 40일 광야생활, 부활 후 40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하신 이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더도 덜도 아닌 40년의 세월을 채우며 지금껏 섭리하시고 계시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한다. 이 일을 위하여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헌트리선교사님은 기뻐하다가 한가지 안타까움을 남겼다. 기쁘고 즐거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먹구름으로 다가왔기에 여기에 글을 남긴다.

“나는 전두환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안됐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차갑고 냉랭한 기운도 우리 뜨거운 만남을 이기지 못했다. 축복의 시간들을 마치고 우리는 헤어지면서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지난 번에는 “영원히 못 만나겠습니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날 오후 우리가 떠나면 다음날 여행을 준비하고 3일동안 가족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즐거워 하셨다. 또 다른 행복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우리를 환송했다. 행복해 하는 모습에 아들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

한국에 돌아와 보니 구체적인 여행일정과 감사의 메일이 와 있었다. 이후 나는 즐거운 여행중이라 여기고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지역 원로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맨 먼저 전해야 할 사람이라 생각하고 전화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며 헌트리선교사님이 지난 6월 26일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온 세상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이유가 나로 인하여 돌아가셨을까? 우리의 만남이 문제가 있었나? 그때 너무 철없이 좋아했나? 나누는 기쁨을 조절했어야 하는데! 별 생각들이 몰려왔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사모님께서 이미 소천하신 내용을 보내셨는데 미쳐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낸 메일을 그대로 옮긴다.Hong Chang-Hee, I am so sad to tell you that Huh Moksanim passed away, or as the Koreans say torah-kashimnida - went back (home) Monday night, June 26 at 9 p.m. You remember you were here one week earlier, on June 12 and presented him with the gifts and honors from the May Mothers. Tuesday the 13th we packed and that afternoon left for Wrightsville Beach, a three hour drive. There we had three nights and two perfect days of vacation. He walked the beach half an hour on Tues. and a full hour on Weds.; ate lots of delicious sea food, took pictures and was relaxed and happy. Friday morning, June 16, as we were leaving the hotel, he began to have great pain, enough to cause him to be very nauseated, in his stomach - we thought it was his gall stones. He took the pill that has stopped gall stone pain before, but it did not stop. We had a terrible trip back to Cary, but he would not let me stop at a hospital or walk-in clinic. He said he just wanted to get home and to his own bed. The pain continued, and I had to call an ambulance at 5 a.m. Saturday. Once in the hospital ER the doctor quickly examined him and said he needed surgery immediately. They operated right then. He tolerated the surgery very well, and that Sunday and Monday, we all thought he'd be in the hospital a few days and then go home, a little weaker, to recover. But the labs from the surgery showed many, many problems - kidney failure, liver failure, gall bladder problems, and the pancreas was necrotic. Everything got worse and worse and he could have no food or drink because nothing in his digestive system was working. He was very very sick and often in pain, and he slept more and more. But when he was awake he was so sweet, giving each child (all four came and three grandchildren), talking about heaven, about Korea, about our happy times, best trips, best beaches, best memories. He was kind and good to everyone and remembered everyone with love, including you. His memorial service here will be Sunday afternoon, July 2, at 3 p.m. That will be one week before he would be 81. We hope to bring his ashes to bury in the missionary cemetery in Kwangju, probably in October. We are so grateful you agreed so graciously to make the plans for that. Perhaps Jenny and Mary, our oldest and youngest daughters will bring them. I don't think I can make the trip now. We will keep you informed about the plans for them to come. A friend, John Kim, who is the brother-in-law of our friend Kim An-Ok in Kwangju has offered to escort Jenny and Mary and be their interpreter. That would be a huge blessing, as he is bilingual. God is working in all of this to bring it about. How grateful we are that you and your son were here Monday June 12, the day before we left for the beach and the last three days of our "sweet, normal" life. Now he has a new life on heaven and we here are missing him on earth but we know we will be together again. Love never ends. God bless you, Hong Chang-Hee. Moksanim was very proud of you and still is! Martha

메일을 보낸 날짜가 2017년 6월 30일(4일전)로 기록이 남아있었다. 소천 후 바로 적어 보낸 메일이었는데 나는 그동안 누적된 피로에 메일을 간과했던 것이다.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도 헌트리선교사님은 행복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똑같이 마음에 살아계신다. 메일을 보고 나 때문이었을까? 라는 무거운 마음은 사라졌다. 나도 잊었던 헌트리선교사님을 기억해 내었지만 선교사님도 그동안 잃었던 나를 찾으셨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아픔도 오월어머니집 감사의 마음을 전달받고 위로를 받았으며 무척 명예롭게 여기겼다. 가족들과 마지막 여행도 그의 마지막 시간을 빛나게 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여행을 마쳤다고 전했다. 그는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한국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뿐만 아니라 헌트리선교사님는 나에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소원이 있는데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 갈 수 있겠습니다" 나는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았다. 사랑하는 딸들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고 했다. 늘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반쪽은 고향에 반쪽은 한국에 묻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면 모두 환영할 것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책임을 갖고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헌트리선교사 부부는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고 이제야 평안히 죽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의 미소는 계속되었고 한국 식당에 가서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찍은 마지막 사진에서 그 기쁨을 여실히 찾을 수 있었다. 헌틀리 사모님은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고 메일에 남겼다. 예상한 대로 헌틀리선교사님을 사랑하며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환영하며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맺는 이야기

구약성서에 소개되는 욥은 이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과 역경을 치룬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한 사람도 욥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위로 받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가장 잘 대변하는 내용이기도 하다.욥은 이렇게 말한다

[욥기19:23-26]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쓰여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모든 고난을 이긴 원동력이 부활신앙에 있음을 노래했다.'헌트리선교사와 40년' 이글을 오래 오래 간직하며 새삼 또 읽어가면서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한다.여기에는 세례요한이 광야 은둔의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변으로 올라와 외쳤던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고 경험하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이시며 먼저 구해야 할 것도 ‘하나님 나라’ 라고 강조하셨고 부활하심을 확실히 보이시며 마지막 외침도 오직 하나님 나라였다. 바울도 마지막까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살았고 지금까지 우리의 영혼을 복되게 한다. 교회개척, 교회성장, 원동력이 무엇일까? 각자가 배우고 경험한 많은 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한다. 천당 이야기가 맞다. 죽음으로 말하는 하늘나라가 답이다. 목회를 위한 많은 재능들이 필요하지만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내집있네’ 찬송을 부르는 믿음이다.헌트리선교사는 이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여기에 함께하고 있다. 한국에 선교사로 지낼 때에는 그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헌틀리 선교사 부부는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살았다. 지금은 부부가 서로 헤어졌지만 요동하지 않고 그대로 하늘나라에 산다. ‘교회개척연구원’은 오직 천국, 하늘나라 이야기로 원동력을 삼고 출발한다. 그의 나라와 의를 철도, 철로와 같이 여기고 교회는 그 위를 달리도록 해야 한다. 탈선은 재앙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비밀이 크고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 짝퉁 신천지들은 벌거벗은 자의 수치를 드러내고 무너질 것이다.

아! 그 나라는 영원하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를 지극히 높이자.
온 천지 울리도록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선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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